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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 연 장 :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정말 최고였다, 공연을 보며 동지들과 함께했던 옛날이 떠올랐다..." 팝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밴드, 팝의 전설 ‘비틀즈’의 NO.1 트리뷰트 밴드 트위스트&샤우트가 내한합니다. 카피 밴드로는 드물게 세계적인 매니지먼트사 OPUS3의 아티스트인 트위스트 & 샤우트는 단순한 카피밴드를 넘어 진정으로 비틀즈의 음악을 이해하고 연주할 줄 아는 밴드입니다. 그들의 음악은 비틀즈가 왜 역사상 가장 사랑 받고 존경 받는 밴드인지를 느끼게 해줍니다. 비틀즈의 초기 히트곡부터「애비 로드」앨범 수록곡에 달하기 까지 비틀즈 곡을 그 누구보다도 완벽하게 소화해 내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순수주의자라도 비틀즈 팬이라면 반해 버릴 수 밖에 없는 트위스트 & 샤우트의 공연으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짐 오웬 (리듬 기타, 피아노로, 보컬) | 존 레논 크리스 카밀리 (드럼, 보컬) | 링고 스타 QUOTATION “...a high goose-bump quotient...the crowd stood and bellowed for more." “…a must see for any Beatles fans…” - Indianapolis Woman “A-1 performance! I really enjoyed it. It really brought back memories…” “You guys are really great…I couldn’t believe my eyes and ears…”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비틀즈의 노래는? 비틀즈의 역사 비틀즈는 바로 피와 땀으로 세계정복의 열매와 천재라는 칭송을 획득했다. 그들의 성공은 천재성 아닌 가혹한 고행의 결과물이다. 천재성도 피와 땀이 만들어낸 것이다. 결코 하늘이 준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영국 리버풀에서 40년에 태어난 존 레논(John Lennon, 기타)과 42년생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 기타)가 만난 것은 1957년. 애초에는 1943년생으로 막내인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기타), 40년생 스튜어트 서트클리프(Stewart Sutcliffe, 베이스)와 41년생 피트 베스트(Pete Best, 드럼)와 함께 그룹을 짰다. ‘쿼리멘’ ‘자니 앤 더 문독스’ ‘레인보우스’ ‘실버 비틀즈’를 거쳐 가장 멋진 밴드명이라고 할 비틀즈라는 이름이 확정된 것은 1960년. 이듬해 4월 존 레논 영혼의 친구인 서트클리프가 그룹을 떠났고(뇌출혈로 62년 사망) 그로 인해 베이스 자리는 폴 매카트니가 맡게 된다. 그들 성공에 지대한 공헌을 한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Brian Epstein)과 음반 및 매니저 계약을 체결하고 난 뒤인 1962년 8월, 드러머 피트 베스트는 ‘로리 스톰 앤 더 허리케인스’에서 활동하던 링고 스타로 바뀌었다. 이 모든 과정은 단순한 정보나열이 아니다. 그룹의 태동과 형성기만으로도 그들이 1964년 세계를 휘몰아치기 전까지 최소 5-6년간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밑바닥생활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혹독한 무명의 훈련기를 거쳤으며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는 레코드사마다 ‘시절에 맞지 않는 음악’ 이유로 그들을 퇴짜 놓았다. 그리하여 당시 최고 레코드사인 데카(Decca)가 눈앞에서 비틀즈를 놓친 것은 훗날 ‘20세기의 최대 실수’의 하나로 꼽힌다. 비틀즈는 그들이 꽃을 피운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의 호시절을 타고 졸속으로 결성된 다른 그룹들과는 종이 달랐다. 그들은 그 동안 무수한 오디션 실패와 해외 투어로 연주력을 다졌으며 오로지 세계정복이란 목표를 위해 눈물과 배고픔을 삼켰다. 정말 그들 말대로 손이 아프도록 기타를 쳤고 목이 터져라 노래했다. 그들은 그러면서 당시 서구권에서 유행하는 음악을 열심히도 챙겼다. 모르는 게 없었다. 1950년대 블루스와 로커빌리, 모타운 R&B, 틴 팬 앨리 팝, 라틴 음악 등 갖가지 계열의 곡들을 골라 커버 연주했다. 아이슬리 브라더스의 <Twist And Shout>, 스모키 로빈슨의 <You Really Got A Hold On Me>, 바레타 스트롱의 <Money, That's What I Want>, 캐롤 킹의 <Chains>, 리틀 리처드의 <Long Tall Sally>, 척 베리의 <Rock And Roll Music> 등은 그 파편들. 하지만 그들은 이 모든 것을 흡수해 자신들의 독창적 스타일로 빚어낼 줄 알았다. 거기서 <Love Me Do>가, <From Me To You>가, <A Hard Day's Night>가, <I Feel Fine>이 나왔다. 스펀지 같은 흡수력이 길러낸 창조성, 이를테면 노력에 의해 축적된 내공의 폭발이었다. 구체적으로는 먼저 남들 곡의 템포와 볼륨을 업그레이드했고 그 작업을 통해 이후 그들만의 코드 진행감각 즉 독자적 화성을 찾아낸 것이었다. 비평가 그렉 쇼(Greg Shaw)는 말한다. “비틀즈는 단지 뮤지션이 아니었다. 그들은 최초의 그리고 첫째가는 로큰롤 팬이었다. 그리고 바로 음악에 대한 지식과 헌신이 그들을 특별한 존재로 만들었다.” 감성에서 지성으로, 그리고 그 두 가지의 환상적 퓨전! 비틀즈의 무명시절을 놓쳐서는 곤란하다. 초기 곡이라 할 <Love Me Do>에서 <Help!> 까지는 이 출발 이전의 워밍업 시기와 불가분의 관련을 맺는다. 실상 비틀즈 초기 작품은 이 준비기를 떼어놓고는 논할 수도 없다. 하긴 연습 없이 실전을 잘 치른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리고 비틀즈는 나중 실전을 연습처럼 해야한다는 진리도 잊지 않았다. ** 지구촌 전체를 손에 넣다 1964년 2월7일 영국의 더벅머리 네 남자가 미국 케네디 공항에 내리는 순간, 세계의 음악역사는 송두리째 바뀌었다. 유럽과 미국 뿐 아니라 지구촌 전체를 떠들썩하게 한 이른바 '비틀매니아'의 시작. 그것은 이후 음악의 중심이 '젊은이들'과 '대중음악'으로 이동하는 것을 의미했다. 어른과 고전음악은 이제 뒷전으로 물러나야 했다. 비틀즈가 먼저 1963년 영국을 뒤흔들었을 때 그 광풍은 당시 내각을 발칵 뒤집어놓은 성추문 이른바 ‘프로퓨모 스캔들'도 잠재워버렸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정치 판에 관심을 깡그리 잊었다.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미국은 케네디 대통령이 사망한지 불과 3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온 국민이 실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비틀즈가 미국 땅에 상륙하자 그런 일이 언제 있었느냐는 듯 전국이 들썩들썩했다. 비틀즈는 이처럼 정치 사회적 회오리마저 제압하는 엄청난 팝 폭발(pop explosion) 현상이었다. 비틀즈 초기 음악은 한마디로 경쾌한 로큰롤이었다. 1950년대 미국 로큰롤에 영국 특유의 셔플 리듬과 보컬 하모니를 덧입힌 스타일로, 강했으되 느낌은 밝았다. 기본 3코드를 이용한 로큰롤만의 단순한 진행이었지만 1950년대의 로큰롤보다는 훨씬 템포도 빠르고 볼륨도 컸다. 본격적인 밴드중심 로큰롤의 개막이었다. 지구촌의 젊은이들이 너도나도 그들처럼 기타를 치고 드럼을 울려대기 시작했다. 비틀매니아 시대의 음악은 이처럼 '로큰롤 르네상스'를 상징하는 것들이었다. 영국에서 1963년 <From Me To You>는 7주간 1위에 오르면서 당시로 볼 때는 경이적인 65만장 이상의 판매를 기록했다. 그것은 비틀즈가 이후 발표한 11장의 싱글이 모두 정상에 오르는 ‘넘버원 퍼레이드'의 서막이었다. 다음 싱글 <She Loves You>는 선(先)주문만도 31만장에 달하면서 영국에서만 160만장이 팔려나갔다. 이 기록은 폴 맥카트니의 1977년 <Mull Of Kintyre>에 의해 깨질 때까지 무려 14년 간 '영국 최고판매의 싱글' 타이틀을 지켰다. 같은 해 12월 발표한 <I Want To Hold Your Hand>는 <She Loves You>로부터 1위 자리를 승계하며 선(先)주문 94만장에 총 150만장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그들의 꿈이던 미국정복을 이룩해낸 곡도 바로 이 노래였다. 이 곡은 전미 차트 7주간 정상을 차지했다. 1964년 미국에서 <Can't Buy Me Love>는 판매 신기원을 이룩했다. 선주문 170만장에 발매와 동시에 모두 200만장이 팔려나간 것이다(영국에서도 첫 주 122만6천장). 굳이 판매고를 거듭 언급하는 것은 비틀즈 광풍(狂風)을 설명하기에 그 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속도감을 갖춘 로큰롤에 소녀들을 미치게 한 곡 중간의 함성 ‘Yeah Yeah Yeah'(비틀즈 시대의 상징어가 됐다)으로 그들은 영국의 침공을 견인하며 지구촌을 손아귀에 넣은 것이다. 성공하기 전 그들이 주로 커버했던 곡을 골라 녹음한 폴 매카트니의 1999년 앨범 [Run Devil Run]에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I Got Stung>를 부른 경위에 대한 폴의 설명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엘비스 레퍼토리는 아니었으나 도입 부분이 맘에 들었고 난 엘비스보다 조금은 더 난폭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터뜨리고 질러대는 로큰롤을 가지고 그들은 마침내 '최강의 로큰롤밴드'로 성장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비틀즈는 더 나아가 '최강의 팝 밴드'가 되고자 했다. 그 비상을 알리듯 1965년 가을 때마침 현악 반주의 <Yesterday>가 나왔다. *** 거리의 록을 전당의 예술로 초기에 그들은 기타로 곡을 썼고 그래서 그 때의 곡들은 업 비트의 장조계열 곡들이었다. 그러나 ‘제5의 비틀'이라는 프로듀서 조지 마틴(George Martin)을 만나면서, 그로부터 피아노의 미학을 터득하면서 그들은 느린 단조계열의 발라드 팝을 쓰기 시작했다. 이제 거리의 록은 완전히 근사한 전당의 예술로 ‘신분상승'했다. 그것을 상징하는 곡이 <Yesterday>와 <Eleanor Rigby> 그리고 앨범 [Rubber Soul], [Revolver],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였다. 특히 존 레논에게 이 부분의 충격은 절대적이었다. 갑자기 비틀즈 노래는 사랑타령에서 ‘사색과 인생'으로 바뀌어갔다. 중기의 대표적인 노래들인 <Girl>, <In My Life>, <Eleanor Rigby> 는 이전 노래와는 확실히 깊이가 달랐다. 비틀즈는 싱글 중심이 아닌 앨범 중심으로 음악작업의 축을 전환했다. 곡도 커버 버전은 완전히 걷어치우고 철저히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 콤비(더러 조지 해리슨)의 자작으로 앨범을 채우기 시작했다. 평자들이나 대중들 할 것 없이 일제히 비틀즈의 최고 명반으로 중기작품들을 거론하는 이유는 이런 저간의 상황이 있다. 물론 무엇보다 음악이 너무도 우수하다는 점이 작용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얼마 전 영국인들 20만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권위 있는 ‘버진(Virgin) 올 타임 톱 1000 앨범' 여론조사가 말해준다. 이 리서치에서 [Revolver]가 당당 1위를 차지했으며 [Sgt. Pepper's…]는 3위, [Rubber Soul]은 34위에 올랐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당시 미국 문화계 인사들과 히피들 사이에 급속히 퍼져나간 싸이키델릭(Psychedelic) 풍향이다. 환각과 약물로 이미지화된 이 흐름은 기존의 지배적 가치와 이데올로기에 대해 반기를 들고 문화적 대안(代案)을 찾고자 한 일종의 '문화운동'이었다. 이 부류의 사람들은 의식확장을 위해 약물 LSD를 실험했고 동양종교를 탐색했고 갖가지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에 대해 항의의 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그들의 최종적 캐치프레이즈는 ‘사랑과 평화'였다. 버진 조사에서 1등을 뺏겼지만 여전히 팝 역사상 최고의 명반으로 꼽히는 1967년 앨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는 바로 싸이키델릭과 히피의 ‘안티' 성향을 농축해낸 작품이었다. 이와 함께 그들은 다시 시사주간지 '타임'의 커버스토리를 장식했다(타임에 커버로 두 번 등장한 대중가수는 비틀즈 밖에 없다). **** 미래의 기약-4분의 4는 역시 하나! 이 무렵에 그룹을 대표하던 존은 비틀즈 아닌 필생의 동반자 오노 요코와의 관계에 빠져 들어갔으며, 폴은 그룹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넷 가운데 단연 최강자로, 실세로 솟아났다. 존과 폴 간의 균형이 깨진 것을 의미하는 이러한 ‘헤쳐' 상황은 비틀즈를 ‘존과 폴의 그룹'에서 ‘폴 휘하의 그룹'으로 만들었다. 조지 역시 자신의 음악세계에 액센트를 두기 시작했고 곡을 쓰지 못했던 링고도 마침내 <Don't Pass Me By>나 <Octopus's Garden>과 같은 곡을 써내면서 자신감을 획득했다. 애플사에서 낸 첫 앨범 [The Beatles](일명 화이트 앨범)는 불가피하게 ‘한지붕 네가족'의 앨범이 되어 나왔다. 자신이 쓴 곡을 녹음할 때 다른 멤버들은 그룹동료가 아니라 거의 세션맨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나중에는 비틀즈의 재정문제를 관장하는 사업고문 발탁을 놓고 존 조지 링고와 폴 간의 입장차이가 불거지면서 멤버들간의 갈등도 노출되었다. 존과 폴은 모든 면에서, 가령 예를 들면 결혼날짜와 장소와 같은 문제에서도 사사건건 경쟁적 심리전을 전개했다. 말기에서 비틀즈가 차지한 차트 넘버원 곡들은 존의 <The Ballad Of John & Yoko>와 <Come Together>, 조지의 <Something>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폴이 주도적으로 쓴 곡이었다. 폴의 작곡 감각은 이후에도 접하기 어려울 만큼 이 시기에 환상의 절정을 과시했다. 해산 직전에 나온 <Let It Be>나 <The Long And Winding Road>를 드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 곡들은 비틀즈 작품이기보다는 폴의 솔로 곡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폴의 천재성은 말기의 앨범 [The White Album], [Abbey Road]에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굳이 싱글이 아니었어도 전자의 <Ob-la-di Ob-la-da>, <Martha My Dear>, <I Will>, 후자에서는 <You Never Give Your Money>, <Golden Slumber>, <She Came In Through The Bathroom Window> 등 그가 주조한 곡들은 어떤 싱글보다도 사랑을 받았다. 기습적인 비틀즈 해산 기자회견을 가진 것도 폴이었다. 하지만 존 폴 조지 링고를 아무리 개별적으로 기억하려고 해도 사람들은 언제나 비틀즈라는 집합체로 기억한다. 말기 이후가 ‘4분의 4'이었을지언정 대중의 뇌리에는 언제나 ‘하나'였다. 그리고 영원히 하나임은 비틀즈 재결합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관측을 깨고 1995년 폴 조지 링고가 투합해 존의 노래 <Free As A Bird>와 <Real Love>를 만들어 내놓았을 때 다시금 입증되었다. 여기서 링고 스타의 비틀즈론(論)을 들어보자. “우린 신비로웠고 그것은 텔레파시였다. 우리가 녹음실에서 작업했을 때…그걸 묘사하기란 정말 어렵다. 우린 넷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였다. 우리 모두의 마음은 언제나 동시에 움직였다.” 신기하게도 비틀즈는 세월이 흘러도 역사에 묻히지 않고, 갈수록 위대성과 가치가 증대한다. 미국 브라질 쿠바 일본 그리고 한국을 가리지 않고 [1]이 전 세계적으로 판매열풍을 일으켰다는 사실은 뉴 밀레니엄 첫 스타마저 비틀즈의 몫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존 레논은 1980년 팬의 총탄에 피살되었다. 그리고 2001년 조지 해리슨도 세상을 떠났다. 조지가 사망하면서 ‘타임’지가 기술한 것처럼 이제 비틀즈의 재결합에 대한 팬들의 소망은 사실상 끝이 났다. 두 사람이 우리 곁에서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4인의 음악마법’에는 유통기한이란 게 없다. 1960년과 2003년 사이의 40년 이상의 세월의 간극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이에 비틀즈는 언제나 있었고 지금도 슈퍼파워이며 앞으로도 위력을 발할 것이다. 그들은 불로(不老) 불사(不死) 불패(不敗)의 그룹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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